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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8. 18世 〉9. <부정공>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경연참찬관휘지상가장(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經筵參贊官諱贄祥家狀)
1. 문헌 목록 〉18. 18世 〉11. <부정공>학생공휘태상가장(學生公諱台祥家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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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부정공>학생공휘석상가장(學生公諱奭祥家狀)
學生公諱奭祥家狀 吾玉川趙氏之先出自高麗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爲東方著姓至玉川府院君忠獻公諱元吉忠勳懿德有保宗祊虔谷先生諱瑜道學節義爲世師表有孫井邑縣監諱智崑友義政敎達友邦國泰仁縣監大承勤王化民垂耀國乘訓練奉事諱珏孝義有著通德郞諱義吉 仁廟丙子擧義以明春秋大義此六世以上先德之淵深悠遠也高祖諱維春曾祖諱東耘祖諱新命考諱廷直 贈司僕寺正妣淑夫人淳昌薛氏世蔓女文良公恭儉后府君諱奭祥字周仲以 正廟戊午十月十日生體直氣和智圓行方內服庭訓外遵嘗以呂榮公所謂內無賢父兄外無嚴師友而能有成者鮮矣之語爲究竟要法一心專用日日時時供歡於菽水之養殫誠於溫淸之節必致愉色婉容事兄極恭愛弟亦友恒以父母俱存兄弟無故爲天下一樂之十分至道其於世間富貴貧賤榮辱毁譽置之分外未暇及論其休戚也矣因天地生物之有始有終淑夫人以希三之齡而見沒寺正公以希六之壽而臨終伯兄以希九之歲而喪逝二弟亦巳俱亡俯仰宇宙慨廓凉不勝思古傷今之虛懷寓志於川雲淡蕩魚烏高深之天機自樂移居梅雨江日事逍遙於江干而江畔有漾碧亭舊址亭是族先祖三灘公所築與金河西白玉峰兩賢同榻講學同舟風浴詠歸之所也亦爲溯洄其往跡時與族戚賓朋之情契珍重者論道講誼酣觴賦詩人暢叙幽情資送餘年矣後皷岩阡即先隴也而日必冠帶携孫曾數三輩作省掃行亦多諄咡詔先徽之有傳於後者若非疾病風雨迫不得巳事則不廢焉此亦爲百行之一道也壽躋八耋而終于 高宗丁丑四月二十五日墓在皷岩洞奉事公塋白虎嶝右局艮原配陽川許氏峵女墓用魯衛禮生二男一女長永才早卒次永琦女適平山申錫休琦無嗣有一女取從伯永舜第二男正根爲嗣女適南陽宋某申性湜申 湜申婿二男曾孫一男一女男炳吉女德水李敏奎妻宋有甲宋婿男玄孫二男一女男允基賢基女適扶安金榮德賢基質美好學聞田艮齋先生浮海講道如管幼安故事徒步往從學于繼華島其志固可嘉尙也若將有承府君緖業矣命送甚促竟至於秀而不實可勝惜哉窃恐府君之德行今無所述將至見泯故謹述止此可以爲來裔徵信先德之資疑 孝玄孫 允基 謹述 학생공휘석상가장(學生公諱奭祥家狀) 우리 옥천조씨의 선대는 고려 검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璋)으로부터 동방에 나타난 성씨가 되어 옥천부원군 충헌공 휘 원길(元吉)에 이르러 충성한 훈업과 아름다운 덕이 나타나게 되었다. 건곡 선생 휘 유(瑜)는 도학과 절의로 세상에 사표가 되었으며 손자 정읍 현감 휘 지곤(智崑)은 우애한 의리와 정교한 교화로 명성이 나라에 사무치고 태인 현감 휘 대승(大承)은 나라일에 부지런하고 백성을 교화한 공적이 나라 역사에 나타나 빛났다 훈련원 봉사 휘 각(珏)은 효의로 저명하고 통덕랑 휘 의길(義吉)은 인조 병자호란에 거의하여 춘추 대의를 밝혔으니 이것이 六세이상 선덕의 깊고 길고 먼 사적이다. 고조의 휘는 유춘(維春)이요, 증조의 휘는 동운(東耘)이며 조의 휘는 신명(新命)이요, 고의 휘는 정직(廷直)인데 증사복시정이요, 비는 숙부인 순창설씨 세만의 따님으로 문향공 공검의 후예이다. 부군의 휘는 석상(奭祥)이요, 자는 주중(周仲)이며 정조(正祖) 무오(戊午)년(一七九八)十월 十一일에 출생하였는데 체격이 곧고 기질이 화하며 지혜가 민활하고 행동이 방정하여 집에서는 부모의 훈계를 복종하고 밖에서는 스승의 훈도를 따랐다. 일찌기 여영공(呂榮公)이 이른바 『안에 어진 부형이 없고 밖에 엄한 스승이 없이 능히 성공한자 드물다』라는 말로서 일생을 지낼 요긴한 법을 삼고 마음을 전일하게 하여 항상 부모의 봉양에 즐거움을 바치고 따숩고 서늘한 방법에 정성을 다하여 반드시 기쁜 빛과 순한 얼굴을 지녔다. 형을 지극히 공순하게 섬기고 아우를 또 사랑하여 항상 부모가 구존하시고 형제 무고한 것을 천하에 제일 가는 즐거움으로 삼고 세간의 부귀빈천 영욕훼예(榮辱毁譽)는 분수 밖에 일로 도외시 하였다. 그 좋고 나쁜 것은 숙부인이 七十三세로 별세하시고 시정공이 七十六세로 임종하였으며 백형이 七十九세로 서거하고 두 아우기 이미 함께 죽었으니 하늘을 쳐다보고 땅을 내려다 볼때 마음이 처량하여 옛날을 생각하고 이제를 슬퍼한 회포를 이기지 못하고 구름은 담담하고 시내는 출렁이며 새는 높이 날고 고기는 깊히 잠수질하는 하늘 기미에 뜻을 붙여 스스로 즐거워 하여 매우(梅雨) 내리는 강마을로 옮겨 살면서 날로 강가를 산책하였다. 강 언덕에는 양벽정(漾碧亭) 옛터가 있으니 이 정자는 족선조 삼탄공(三灘公)이 지은 바로 김하서(金河西:하서는 김인후(金麟厚)의 호) 백옥봉(白玉峰:옥봉은백광훈(白光勳)호) 양현으로 더불어 탁자를 같이하여 학문을 강의하고 배를 함께 타고 소풍하며 시를 읊고 돌아온 곳이었다. 부군이 또 이곳에서 지나간 자취를 거슬러 살피며 때로 족척과 아름다운 손님으로 더불어 도를 의논하고 옳은 의리을 강론하며 술잔을 기울이고 시를 읊어서 그윽한 정을 펴며 여생을 보내었다. 뒷편 북바위(皷巖)의 묘도는 곧 선영으로 날마다 의관을 갖추고 손자와 증손자 서너명을 이끌고 성묘를 가며 선조의 덕을 거듭 말로 가르쳐 주었다. 만일 질병과 풍우가 아니면 그만두지 아니하였으니 이 또한 백가지 행실의 하나였다. 향년八十세로 고종(高宗) 정축(丁丑)년(一八七七)四월 二十五일에 별세하니 묘소는 북바위 봉사공 산소 백호동 오른쪽 간좌 언덕이다. 배 양천허씨는 굉(峵)의 따님으로 묘소는 부장이다. 남은 영재(永才)·영기(永琦)인데 영재는 일찍 죽고 딸은 평산(平山) 신석휴(申錫休)에게 출가하였다. 영기는 후사가 없어 영순의 둘째 아들 정근(正根)으로 양자하고 딸은 남양(南陽) 송모(宋某)에게 출가하였다. 증손자는 병길(炳吉)이요, 녀는 덕수(德水) 이민규(李敏奎)에게 출가하고 현손 남은 윤기(允基)·현기(賢基)요 여는 부안(扶安) 김영덕(金榮德)의 처였다. 현기(賢基)가 바탕이 아름답고 학문을 좋아하여 전간재(田艮齋:간재는 전우(田愚)의 호)선생이 관유안(管幼安) 고사처럼 바다에 떠서 도를 강론한다는 말을 듣고 도보로 계화도(繼華島)를 가서 수학하였으니 그 뜻이 진실로 아름다와 장차 부군의 유업을 이을까 하였는데 명도가 궁박하여 마침내 빼어나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였으니 심히 애석한 일이다. 내가 부군의 덕행을 기술하지 아니하면 장차 민몰할까 두려워삼가 이와 같이 기술하여 후손이 선덕을 증빙할 자료로 삼게 한다. 효현손(孝玄孫) 윤기(允基)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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